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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유성룡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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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메시지

 

: 군주론의 훌륭한 리더라는 관점에서 징비록에 등장하는 장수를 분석하는 글

 

징비록은 전체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류성룡의 개인적 감정이 매우 강하게 드러난 다음 문장이 특히 인상 깊었다.

 

“아! 이야말로 온 나라 안의 왜적을 순식간에 물리치고, 싫도록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기회였으니, 이를 놓치지 않았다면 이후 수년 동안 어렵게 싸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천하의 큰일을 그르쳤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은 김경로 장수로 일본군의 퇴로를 막지 못한 것이 전쟁의 장기화를 초래했다고 개탄한 것이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성격의 류성룡은 좀처럼 흥분하지 않지만, 두 번에 걸쳐 사람들을 문책하고 강하게 질책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천혜의 요새인 조령(문경새재)을 지키지 않아 패전한 신립이었고, 두 번째가 바로 김경로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단 한 명의 장수, 김경로의 잘못으로 인해 장기전이 되었던 것일까?

 

징비록에 따르면, 징비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 명나라가 조선에 대부대를 파견해 왜적을 물러가게 했다. 명나라의 철수 소식을 듣고, 류성룡은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과 김경로에게 왜적의 후퇴 경로를 차단하고 공격하라고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두 장수께서는 길가에 복병을 배치한 다음 왜적이 지나갈 때 그 뒤를 치시오. 왜적들은 굶주리고 지쳐 대항할 수도 없을 것이니 한 놈도 남김없이 잡을 수 있을 것이오.”

 

이시언은 즉시 류성룡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지만, 김경로는 주저했다. 류성룡이 군관 강덕관을 보내 김경로에게 신속히 출발할 것을 독촉하자, 김경로는 왜적을 추격하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왜적이 패주하기 하루 전, 김경로는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의 부대를 피해 재령으로 도망쳤다.

 

왜장들은 군사를 이끌고 밤새 도망쳤고, 병사들은 지쳐 군량이 부족했다. 우리 군의 공격은 없었고, 명나라 군사들도 뒤따르지 않았다. 이시언만이 추격했으나, 겨우 뒤쳐진 자들만 처치했다.

 

류성룡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병사들이 왜적을 공격하여 주요 적장들을 사로잡았더라면 한양의 왜군은 무너지고, 기요마사 또한 퇴로가 차단되어 패배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한강 이남의 왜군도 연이어 무너지고, 명나라 군사들은 단숨에 부산에 도착했을 것이다. 

 

김경로 장군이 왜적의 퇴로를 차단지 않은 것이 전쟁의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까? 퇴로를 성공적으로 막았다면 임진왜란의 전개가 어떻게 달라졌을지에 대한 가정은 흥미롭다. 그러나 김경로 장군의 행동 부족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결정적이었는지, 단순히 개인의 잘못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아닌지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균쇠]에서는 문명의 발전과 인류 역사의 발전 차이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로 무기, 군사 기술, 전염병, 농업 생산을 기반으로 한 산업과 경제 기술 발전을 언급한다. 지리적, 생물학적, 환경적 조건이 인류 역사의 불평등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의 상황 역시 복합적인 구조적 요인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예를들어, 당시 일본군은 조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고, 조선군은 전통적인 무기인 활에 의존했다. 조총의 파괴력은 활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조선군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의 지리적 여건 역시 일본군의 침략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조선은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통로 역할을 했고, 이는 일본군의 침략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조선의 지형적 특성과 전략적 위치는 일본군의 진군을 용이하게 했고, 이는 방어에 어려움을 겪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전개는 단순히 개인의 행동이나 실수로만 설명될 수 없다. 전쟁의 장기화는 조선의 군사적 열세, 지리적 특성, 그리고 당시 사회의 구조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다이아몬드의 관점에서 보듯이, 문명 간의 충돌에서 개인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구조적이고 환경적인 조건들이다. 임진왜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며, 김경로 장군의 개인적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김경로 대신 이순신 장군이 명령을 받았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순신이 김경로 대신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면, 임진왜란이  순식간에 끝났을 수도 있. 그러나 이를 단정짓기엔 너무 많은 변수들이 얽혀 있다. 이순신 장군은 탁월한 전략적 사고, 결단력, 용기, 부하와의 신뢰 관계가 두터운 리더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앞에서 말한것 처럼 전쟁의 결과는 단순히 한 사람의 역량만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당시의 전황과 일본군의 전략, 그리고 복잡한 지형적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 전투의 양상은 단순한 전술의 문제를 넘어, 지형의 특성과 적의 움직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설령 이순신 장군이 그 지시를 받았다고 해도,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크다. 전쟁은 예측 불가능한 모험과 같아서, 상황이 급변하거나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탁월한 전략과 뛰어난 판단력을 지닌 리더라 할지라도, 전쟁의 종결은 군사적 승리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결정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순신이 퇴로를 막고 조선에서 왜적을 모두 물리쳤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임진왜란의 종결로 이어졌을지는 의문이다. 

 

 

 

교훈의 두 얼굴 : 징비록과 군주론의 접근 방식 비교

 

징비록은 류성룡이 겪은 고난을 토대로 미래의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쓴 교훈적인 저서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떠올릴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공화국 서기로서 외세와 용병들에 의해 흔들리는 복잡한 외교 상황을 직접 경험하며 군주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전략, 통치의 원칙을 제시했다.

 

두 저서는 후세를 위한 교훈과 전략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접근 방식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징비록은 전쟁과 재난에서 얻은 교훈을 통해 미래의 위기를 방지하려는 전략적 반성을 담고 있으며, 군주론은 군주가 권력을 유지하고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태도, 역량, 본성 그리고 전략적 원칙에 집중한다.

 

징비록의 주요 내용은 반성과 개탄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군사 총괄 관직을 맡았던 류성룡 자신의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견해를 상세히 다루지 않은 점이 아쉽다. 이로 인해 징비록은 미래의 위기를 예방하기 위한 교훈적인 목적에는 부합하나, 실질적인 전략적 논의가 부족하여 군주론과 비교했을 때 실용적인 측면에서 미흡하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당시의 정치적 및 군사적 상황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한다. 마키아벨리의 접근법은 전술적, 전략적 실천에 중점을 두어 후세의 군주들에게 실질적인 지침을 제시하며, 이는 징비록과의 주요한 차별점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징비록이 교훈적이고 반성적인 측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만약 더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분석을 포함했다면 훨씬 더 강력한 지침서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